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짓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인데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면 그대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싫던 좋던 살아..
지금 무엇을 하시는 분이기에 그렇게 아파하는지 궁금하다.
메일과 질문하신 내용이 비슷해 이곳에서 같이 답을 드린다.
님의 글에서 어두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진리를 찾을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등이 보인다.
그러나 님의 안타까움과는 별도로 세상은 존재하며 원래부터 정해진 이치대로 생생하게 약동하며 흘러가고 있다. 지금 그대의 안타까움과 절망과 원망은 살아 숨쉬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실체 앞에서 어찌 보면 지적 사치일 수도 있다.
생각 이전에 우리는 먼저 살아야 한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먼저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삶이다.
메일에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무척이나 무의미하다고 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짓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인데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면 그대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싫던 좋던 살아야할 엄중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진리가 보이지 않는 현실과 보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절망하시는 듯 하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과 깨달음을 얻는 것은 13년이 아니라 평생을 걸려도 이루기 어려우며 수천년간 수많은 구도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산야를 헤매다 고혼이 되었어도 이루지 못한 신기루같은 꿈이었다.
님의 안타까움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진리 속에 있는 일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영원히 아무 것을 볼 수 없듯이 진리와 인연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영원히 깨달음의 빛을 볼 수 없다. 인과의 이치는 엄격하여 길이 있는 곳에는 나아갈 수 있지만 길이 없고 인연이 없는 곳에서는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다가갈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세상 탓을 해서는 안된다.
답은 자기 자신에게 찾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대가 길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혼자서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어둠 뿐인 말세의 세상에서 한번도 길을 본적이 없는 자가 어찌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켜 깨달음에 이르겠는가?
지금 그대는 너무 자기 생각 속에 빠져있다. 그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그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서 있을 뿐이다.
자기가 길을 보지 못한다고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둠 속에 살아야만 하는 중생들의 자기변명일 뿐이다.
진리가 보이지 않고 희망이 없다는 것은 진정 길이 없을 때 해야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고 현실 속에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면 그대의 주장은 정당성을 잃으며 지금 그대의 방황과 절망과 분노는 모두 그대 자신의 책임일 뿐이다. 세상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진리가 사라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암담한 세상 속에서 그대는 진리를 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생각일 뿐 진리의 세계는 항상 빛을 드러내며 현실 속에 작용하고 있다. 다만 그대가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진리와 깨달음의 세계는 존재한다. 우리 세대에 깨달음의 증거를 가진 분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인과의 법을 설했으며 반야의 경지가 있다는 것도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명확한 길도 밝혔다.
진리와 인연이 닿은 그대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눈앞에 있는 길을 보고도 길이 없다고 원망하고 있다.
길을 보고자 한다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기 자신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어둠을 박차고 나와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하며 과거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진리의 인연을 만난 것을 인생의 기회로 삼고 밝음의 고리를 새로 돌기 바란다. 길이 보일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주기 바란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악에 물든 세상에 분노한다고 했다. 그러나 분노가 많은 이유는 업이 많기 때문이다. 업이 많으면 의지가 약하며 자기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미약하고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지금 그대는 악에 물들지 않는 자신이 밉다고 하면서 자신 속에 내재된 허약한 의지와 탁한 습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로부터 책임과 결과를 시작한다. 자기 삶의 주체는 자기이기 때문이며 자기를 키워 완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선근이 큰 자는 남에 대한 원망보다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길을 몰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줄 모르고 함부로 사는 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세상은 이치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악으로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은 반드시 그러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니 자기의 운명을 모르고 제 멋대로 악을 저지르는 이들의 삶이 불쌍하지 않은가?
남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 외로운 짓을 하면 외로워지며 망할 짓을 하면 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이 가난하면 자신이 인연을 짓지 않고 게을렀음을 알아야 하고 실패를 했다면 어리석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아 움직이는 힘이 약하면서 현실의 저주를 남 탓으로 돌려서는 안된다. 그대는 길을 보이지 않는다고 주저앉겠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매일 열심히 산다.
대부분의 사람이 절망을 해도 그 속에서도 뜻을 꺽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며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은 그대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인간이 태어난 이유이며 완성에 이르는 길이다.
깨달은 분이 이 생에 와서 왜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큰 사람이 세상에 나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난다. 차원이 높은 신들은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살 곳을 선택하여 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이 크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이 오더라도 오히려 자신을 키우는 복밭으로 삼아 더욱 자신을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불행한 원인이 전생인지, 전전생인지, 무명 때문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대의 불행의 원인이 과거의 원인이면 되었지 그것이 과거 언제의 것임을 알아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성자가 깨달음을 얻어 선천에 가고 또 그위에 오르고 또 올라서 결국은 무엇이 되는가를 물었다.
이 우주의 근원에는 완전한 근원의 세계(창조주, 조물주, 하느님, 불성, 신성)가 있다. 근원의 세계는 완전한 원력과 뜻으로 이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시킨다. 그래서 그로부터 모든 생명과 완전한 법계와 완전한 이치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성자들이 완성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근원의 세계에 들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전한 근원에서 태어난 신성의 씨앗들이 다시 그 열매를 거두어 완전한 그곳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우주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과가 사과의 고리를 돌아 사과로 일컬어지듯이 인간은 성자에 이르게 되어 신성하고 완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지금 님의 질문 중에는 생각 속의 질문이 많다.
생각 속의 질문은 끝이 없으며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생각 속의 질문을 모두 물을 것이 아니라 삶에 도움되는 현실과 관련되는 문제를 질문해주기 바란다. 사실과 관련되는 인과문제가 더욱 많고 중요하다.
따라서 앞으로 가능한한 생각속의 일은 그만두고 사실 속에 있는 일들과 이치를 깨치려고 노력한다면 삶은 좋아질 것이며 많은 의문들은 저절로 해답이 얻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질문]--
안녕하세요. 가입하고 처음 씁니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머리속에 있는 것들이 제대로 정립이 되질 않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래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어 보았습니다. 허선생님의 스승되는 분이시라길래.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전생에 큰 뜻을 품고 이 말법 시대에 오셨는데 어찌 인간의 생은 그리도 배고픔과 굶주림 추위와 절망뿐이었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허선생님의 인과에 의하면, 좋은 전생으로 선천 세계의 보살이 이 생에 와서 왜 고통을 경험해야 했는 지. 좋은 원인을 나쁜 환경이라는 태생의 결과를 가져왔는지.
끝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지만, 평범한 생이란 것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왜 그런 것인지.
이 평범함도 모호한 관념이기 때문에 평범함의 기준과 척도에 대해서는 누구도 규정 지을 수 없는 문제지만.
오직 고통만이 인간을 이상에 이를 수 있게하는 것인지.
이상이란 단어 역시 추상적인 말 장난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예술가들과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일반론은 아니지만, 오직 인간이란 존재는 최악을 통해서만 최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후생에 그 성품과 성향과 근기가 이어진다는 말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꼭 苦를 느껴야 전생의 성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남에게 착취와 멸시와 정신적 학대를 받아야 근기를 시험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말법 시대이기 때문에 그러한 불우한 경험이 그 생을 만들어낸 것인지.
잘못된 세상을 이어받으면 그 공업의 안개 속에 휩싸여 원인이 의외성을 만들고 결과의 오류를 지을 수도 있는 것인지. 인과는 어디서부터 원인이고 어디까지가 결과인지, 순환의 과정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정확한 지점은 어디인지. 허선생님의 글을 읽고 제가 이렇게 불행한 이유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원인이 전생인지, 전전생인지, 이 우주가 시작된 지점인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무명 속에서 나는 무명임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는 한 중생으로서 온 종일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허선생님의 말대로 불경도 왜곡이 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면, 선법 조차도 제대로 된 인과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과정이라면, 저는 어디서 무엇을 읽고 독송해야 지금 제가 찾고 있는 제 심적인 고통의 원인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허선생님의 글들은 제게 외로움을 덜어주는 글들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의 의심들, 과히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들이 제 안에서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허선생님의 글을 보았을 때, 이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에 혼자만의 긴 터널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고 생각 했습니다.
메일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저는 지금도 사회에 적응하기 힘듭니다.
이 나이가 되었는지만, 불교도 썩었고 기독교도 썩었고, 종교가 생기고 우상이 생기고, 숭배가 시작되면 그곳에서 악취가 풍기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럴진대 깨달음과 먼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은 도무지 구할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남들과 다른 처절한 환경이 그 다음은 이루지 못한 영원한 바람의 꿈들이 그 다음은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고,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내가 겪은 일들의 되풀이가 계속되는 연결고리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옳은 것인지에 대한 절망감과 비참함이 이루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제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제 외로움은 가족과 연이 없고, 친구가 없고, 연인이 없어서 생긴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이 생각의 공유, 시각의 차별로부터 오는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과를 제대로 알려면 무엇을 읽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을 경험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이제 내 안은 이미 멸망했고, 죽음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할 때 허선생님의 글을 읽고 기쁨에 떨었습니다.
완전한 절망과 체념 속에서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더욱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선천에 가고 또 그위에 오르고 또 올라서 결국은 무엇이 되는 겁니까?
좋은 세상을 만나면 더 좋은 세상에 가야하고, 그리고, 결국은 정신을 향한 토너먼트처럼 느껴지는 건, 제가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글러버린 인간이기 때문입니까
- 진실의 근원(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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