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운영의 이치는 한 사람의 뛰어난 기업가는 수천 수백만의 노동자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수천 수백만의 노동자는 스스로 먹고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신의 업에 의하거나 새로운 인연이 닿아서 생깁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인연이 만나 생기는 것이며 원인이 없이 나타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애아가 나타나는 원인도 이러한 이치에 의해 과거에 자신이 지은 업이나 부모의 환경이라는 인연을 받아 태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계통에서는 장애의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한 하느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이 하느님이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증빙하기 위해 한 인간을 고통의 시험에 들게 하고 나중에 다시 은혜를 베풀어 신의 은혜를 증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장난스런 일이며 하느님의 선의지와 자비를 생각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창조적 주체입니다. 이러한 장엄한 생명의 역사는 조물주라고 해도 관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스스로 자신을 결정하는 능동적 주체이듯이 신의 자식인 인간 또한 이를 이어받아 살아있는 생명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아래 자신의 운명을 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 일은 완전한 이치 속에서 자기 책임하에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생에서 장애의 인연을 만난 이들은 자신이 왜 그러한 불행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야 했느냐고 억울해하지만 그것은 이미 엄정한 인과에 의해 자신의 삶의 일부로 다가온 것인 만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세상 일은 수많은 원인에 의해 수많은 경우가 나타나는 것이니 세상 속에는 좋은 운명을 얻는 이에서부터 극심한 불행을 안고 태어나는 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부류가 있게 됩니다.
자신의 운명이 불행한 경우에는 인과에 의해 나타나는 세상의 법칙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불행이 나타나지 않도록 성찰하고 이생을 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복밭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애는 인간이 가진 수많은 흠 중 하나로서 육체와 경제적인 면에 국한된 작은 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육체적 장애보다 더 큰 시련이 많고 많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회의 행복과 국가의 독립과 참된 진리를 위해 자신의 가정과 몸을 바쳐야만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시련과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육체적인 장애는 너무나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 장애를 만났을 때 이에 대해 너무 비관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생명의 이치상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단지 육체적으로 호사하여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와 세상을 축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자 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불행의 인연이 닿았을 때는 자신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인류의 빛이 된 수많은 선현들을 생각하여 불행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을 잘 극복하여 더 좋은 자신을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성자들이 최악의 인간적 상황에서 성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의 빛을 버리지 않고, 그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그 마음을 정화시키고 완성시킬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반드시 오탁악세가 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온실 속에 고이 자란 것들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 머물게 되므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은 오직 시련을 이겨낼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 또한 그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장애는 인간을 더욱 승화시키기 위한 밑거름이며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인 것입니다.
이러한 장애와 시련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고 오늘날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큰 문제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장애자를 자신에 비추어 매우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소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쾌락을 즐기는 것에 인생의 목표를 두어 자신들과 같이 쾌락과 소유와 집착을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들에 대해 매우 불행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으며 정신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상인들은 한평생을 쾌락과 소유를 위해 집착하며 이치를 어기며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곧 인연이 다하여 한과 집착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되는데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인들의 삶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며 그의 영혼을 위하여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낭비적인 삶을 살다가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길이 사라지고 동물적 욕망과 집착이 번성한 곳에서는 정상인들이 추구하는 삶인 현실의 출세와 부귀영화는 누리면 누릴수록 그 영혼은 어두워지고 무거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두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둠과 더 많이 타협해야 하고 더 많은 권모술수와 집착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개인이 정상적인 영혼을 가지고 바른 인연을 만나 세상을 축복하며 올바르게 산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은 없다고 할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어둠과 거짓이 만연한 말세에서는 정법을 만나 좋은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인연과 소유와 쾌락 속에서 동물적으로 살다가 애욕과 집착 속에서 죽어 유혼이 되는 불행한 운명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세에서는 장애인보다 정상인이 더 불행하다는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서는 장애아로 태어나는 것은 다행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장애아는 악연을 접할 기회가 적어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영혼을 더 이상 망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거의 거동을 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그 속에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게 되며 그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고귀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자격과 가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구조상의 장애로 자신의 영혼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운전사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엔진이 불량인 때에는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뇌라는 기구가 불량이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식물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 없으나 인간으로서의 의식작용은 가능한 것이며 그만큼 자신의 영혼은 가꿀 수 있게 됩니다.
이들의 영혼은 완성으로 향하는 거대한 순환고리 가운데서 잠시 장애를 당해 멈춘 상태라 볼 수 있을 것이며 최소한 그 영혼은 보존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승화시켜 완성을 향한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소중한 사례를 많은 위대한 장애인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님의 말대로 장애자들의 삶은 매우 비참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을 보는데 있어서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일은 인연에 따라 살다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여건이 되면 그 사람을 완전하게 도와주면 좋겠지만 어찌 그 사람에게 모든 정성을 쏟을 수 있으며 어찌 그사람만을 보살펴 줄 수가 있겠습니까?
현실 속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전쟁과 범죄, 지진과 자연재해, 각종 사고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들 모두 잘 보살펴주고 문제가 없도록 해주고 싶지만 현실 속에서 자원과 인연은 한정이 있습니다. 어디에 먼저 손을 써야 하겠습니까?
인연에 따라 여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가족과 국가가 능력이 닿는한 최대한 보살피고 가르쳐 각자의 능력과 그릇대로 살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이나 국가의 여력이 한정이 있고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불행한 이를 보살피는데 모든 정력과 예산을 다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개인이 자기의 책임으로 살도록 해야 하며
둘째는 능력이 있는 자를 키워 그들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가정과 나라를 윤택하게 함으로써 그 속에 살고 있는 구성원 모두를 인간답게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운영의 이치는 한 사람의 뛰어난 기업가는 수천 수백만의 노동자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수천 수백만의 노동자는 스스로 먹고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치를 무시하고 감정에 휩쓸려 여러 부분의 국가경영에 투자할 예산을 가벼이 보고 복지예산에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장애자 천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가난해지자는 어리석은 이상주의자의 환상일 뿐입니다.
--[질문]--
태어날 때부터 지체 부자유한 기형아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하고, 그냥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의 경우는
그 인생이란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 아무일도 못하고 신세만 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과연 극복할 수 있는 건가요?
이 혼미해져가는 말세기에
진리를 알리고자 노력하시는 허해구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 진실의 근원(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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